드보르작 첼로 협주곡과 차이콥스키 로코코 변주곡 : 카라얀, 로스트로포비치, 베를린 필의 전설적인 연주
첼로는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유사한 악기로 불리며,
교향곡, 관현악, 실내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독주를 위한 곡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첼로의 저음 중심 음역과 고음에서의 코맹맹이 소리라는 편견도 있지만,
안토닌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b단조 Op.104》는 이러한 선입견을 단번에 깨뜨리는 걸작이다.
이 곡은 드보르작이 미국 국립 음악원장으로 재임하며 흑인 영가와 인디언 음악,
그리고 고향 보헤미아의 민요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작품으로, 첼로 협주곡의 정수로 꼽힌다.
여기에 차이콥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함께 담은 음반,
《Dvorak Cello Concerto; Tchaikovsky Variations Rococo - Karajan Berliner Phil. Rostropovich》
(1968, Deutsche Grammophon)은 20세기 클래식 음악의 전설적인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드보르작: 체코의 향수와 미국의 영감
드보르작(1841~1904)은 체코 민족주의 음악의 거장으로, 스메타나의 뒤를 이어 체코 음악을 세계에 알렸다.
프라하 근교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브람스의 후원과 《슬라브 무곡》의 성공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드보르작은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가 국립 음악원장으로 활동하며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와 《첼로 협주곡》 같은 명작을 남겼다.
《첼로 협주곡 b단조》는 1894년 뉴욕에서 빅터 허버트의 첼로 협주곡 공연을 듣고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
이 곡은 보헤미아 민요의 애틋한 선율과 흑인 영가의 애수, 인디언 음악의 리듬이 절묘하게 융합된 작품이다.
브람스는 이 곡을 듣고 “왜 내가 이런 첼로 협주곡을 쓰지 못했을까”라며 감탄했다.
1악장은 힘찬 민족적 정서와 목가적 선율로 시작되며, 2악장은 첫사랑의 추억을 담은 서정적 멜로디로 감동을 준다.
3악장은 론도 형식의 발랄한 리듬과 흑인 영가, 보헤미아 무곡이 어우러져 생동감 넘치는 마무리를 선사한다.
이 곡은 드보르작의 고국에 대한 향수와 새로운 세계에서의 경험이 녹아든, 첼로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한 걸작이다.
로스트로포비치: 첼로의 황제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는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로,
풍부한 표현력과 웅장한 음색으로 첼로 연주의 새 지평을 열었다.
소련 아제르바이젠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사사받은 그는
1942년 차이콥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으로 데뷔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솔제니친을 옹호하며 소련에서 망명한 그는 1989년 베를린 장벽 앞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며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첼리스트로서뿐만 아니라 지휘자, 교육자로도 활약하며 장한나 같은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9번 녹음할 정도로 이 곡에 깊은 애정을 쏟았다.
그의 연주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섬세한 감성으로 드보르작의 보헤미안 선율과 민족적 정서를 생생히 전달한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완벽함의 추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은 20세기 클래식 음악계를 지배한 지휘자다.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종신 음악감독에 취임한 그는 정밀한 앙상블과 다이내믹한 사운드로 ‘꿈의 오케스트라’를 완성했다.
카라얀의 연주는 치밀하고 섬세하며, 흐름의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는 협주곡 연주에서 독주자와 충돌할 가능성을 낳았다.
그럼에도 이 음반에서 카라얀과 로스트로포비치는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치열한 긴장감 속에서도 곡의 정서를 놓치지 않는 명연을 선보였다.
차이콥스키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차이콥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33》은 모짜르트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로코코 스타일의 우아한 테마를 바탕으로 작곡된 작품이다.
1877년 모스크바에서 초연된 이 곡은 축소된 오케스트라와 첼로의 고난도 기교를 요구하며,
약 20분간 테마와 7개의 변주가 끊김 없이 이어진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는 차이콥스키의 섬세한 선율과 화려한 기교를 완벽히 소화하며 곡의 경쾌한 매력을 극대화한다.
전설적인 음반
1968년 베를린 예수그리스도 교회에서 녹음된 이 음반은
아날로그 레코딩의 따뜻한 사운드와 자연스러운 울림으로 여전히 사랑받는다.
로스트로포비치의 격정적인 첼로와 카라얀의 치밀한 오케스트라가 만나
드보르작과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 음반은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의 기준으로 꼽히며, 격렬하고 화려한 다이내믹으로 다른 연주와 차별화된다.
비록 일부는 카라얀과 로스트로포비치의 경쟁적 연주가 곡의 서정성을 다소 덮었다고 비판하지만,
이 연주의 압도적인 에너지와 완성도는 부인할 수 없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체코의 향수와 미국의 영감이 어우러진 불朽의 명작이며,
차이콥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은 로코코 시대의 우아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보석이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열정, 카라얀의 완벽주의, 베를린 필의 정교함이 하나로 녹아든 이 음반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반드시 소장해야 할 필수 레코딩이다.
180g, 200g LP와 SACD로 재발매된 한정판은 음질과 디자인 모두 뛰어나지만,
음원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어 이 전설적인 연주를 언제든 감상할 수 있다.